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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생애 순화군 가계도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

by 리베로수 2021.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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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생애 순화군 가계도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 조선 중기 왕족.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란, 회령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1608년 일부 대신들과 명나라에서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자 이를 불안해 한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 · 김제남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臨海君

출생-사망
1574 ~ 1609

활동분야
정치

선조의 첫째 서자(庶子). 어머니는 공빈 김 씨(恭嬪金氏)이다.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란, 회령(會寧)에서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1608년(광해군 즉위) 일부 대신들과 명나라에서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자 이를 불안해 한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임해군 가계도

개설

선조의 서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진(李珒), 자(字)는 진국(鎭國). 어머니는 사도시 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의 서장자이며 공빈 김 씨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이다. 나이 5세에 모친을 잃고 적모 의인왕후 손에서 자랐으며 광해군과는 달리 생모의 얼굴을 기억하는 탓인지 의인왕후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복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막장이자 인간 말종으로 악명이 높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자 시절부터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왕족이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하여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김귀영(金貴榮)·윤 탁연(尹卓然) 등을 대동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그 해 9월 반적 국경인(鞠景仁) 등에 의하여 포로가 되어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겨져 고원(高原)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여러 차례 석방협상 끝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본래 성질이 포악한 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그 포악함은 더욱 심해져서 분을 발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었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포로로 있을 때 친분을 기화로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보내서 내정을 탐사하려고 하였다.


그 뒤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열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 되었고, 이듬해 죽음을 당하였다.

1623년(인조 1)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신원(復爵伸寃: 관작을 회복하여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내린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개차반 인성의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 임진왜란 중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원래의 임무는 하지 않고 순화군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한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닌 사건이다. 결국 참다못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겨버렸는데 왕자들을 적에게 넘기는 반역을 할 정도로 화났다는 말.

오죽했으면 일본군조차도 이들의 막장 행각을 듣자 혀를 차며 국경인 형제와 함경도 백성들을 이해하고 막장 왕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나지만 임해군은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성격이 포로 생활 동안 겪은 일 때문인지 더욱 막장이 되어버려서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깽판만 치고 다녔다.

이런 임해군의 미친 짓에도 그 미친 왕자를 난리통 속에서 구한 사람이 정문부였으나 정문부도 전쟁 중에 반란을 도모한 국경인을 척살하기 위해서였지 임해군을 위한건 전혀 아니었다.

일단 임해군은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폭행,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때 한음 이덕형의 상소를 받은 선조도 임해군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라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조는 임해군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그래도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며 질책만 하고는 처벌은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무엇보다 임해군은 형제간의 우애도 나빠서 동복동생인 광해군 때문에 자기가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해군을 미워했는데 이는 적반하장보다는 열등감에 가까울 듯하다.

광해군도 그런 임해군을 증오했는데 명색이 친형이라는 작자가 왕실의 모범을 보이고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에만 힘을 써서 왕족에 대한 여론을 계속 깎아먹고 있으니 어떻게든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세자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그런 임해군을 증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백성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친형제마저 학을 뗄 정도로 인성과 행실이 막장인 임해군을 선조가 세자로 책봉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임해군의 막장이라 불러도 할 말 없는 더러운 인성을 보면 왕이 될 경우 연산군보다 심한 암군이자 폭군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선조는 이런 아들을 계속 감싸고만 돌아 임해군은 더욱 막장질만 골라했다. 어떻게든 임해군을 처벌하라 상소가 빗발치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광해군도 이렇게 만행 밖에 저지를 줄 모르는 동복형 임해군을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고 선조 생전에도 이미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가 끝끝내 감싸고 돌아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다시피 임해군을 비호해주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훗날 영창대군을 지키려고 사실상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서 서인, 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각 당파를 초월해서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 말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만력제가 황태자와 주상순을 두고 일으킨 후계자 교체 문제로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입장을 바꿔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으로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고 장남인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얌전하게 행동하면 다들 임해군이 세자 자리를 노리고 점수를 따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임해군이 정신 못 차리고 계속 망나니짓을 한 것은 임해군 나름대로의 처세가 아닐까 하는 설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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