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능양군 가계도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최후 평가 선조 광해군 가계도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 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 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 융 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 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 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 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체류일 수, 매매 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생애 후반
소현세자 일가 숙청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 씨(후일의 귀인 조 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 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 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이후 유배 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 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 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선조 광해군 인조 능양군 가계도
전란 이후
한당의 영수 김육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 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 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 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과 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평가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라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가 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세자를 요구했다. 이처럼 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손해를 보았다.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친명 배청 주의자인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교 기조를 실리외교에서 친명 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게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전부 몰살시켰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문서엔 명이 내려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4만 필의 옷감과 소 4천 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화의는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최후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 씨를 사사(賜死)하였다.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 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 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 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 보편(東史補編)》 《서연 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 않고 서녀 효명 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 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 옹주와 숭선군 낙선 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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