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여왕 가계도 잉글랜드의 여왕 Elizabeth I 잉글랜드의 여왕(재위 1558∼1603)으로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으며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빈민구제법에 의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녀는 통일령을 선포하여 국교회가 주도하는 종교 질서를 확립하여 신교 국가의 본격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일련의 입법을 통해 산업화와 가격혁명에 따른 부정적 결과들을 조절하려는 대응책을 추진했고, 잉글랜드 사회정책의 초석이 되는 구빈법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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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7세 때 처음 시도되었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도 재개하였다. 그녀는 가톨릭의 수호자인 에스파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신교를 구하고, 잉글랜드가 대양으로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치세 말기 특허를 주어 동인도 회사의 교역활동을 도왔다.
엘리자베스 1세
출생-사망
1533.9.7 ~ 1603.3.24
왕가
튜더 왕가
가족관계
부친 : 헨리 8세(Henry VIII)
모친 : 앤 볼린(Anne Boleyn, 1533년 결혼, 1536년 처형)
계보
전임자 : 메리 1세(Mary Ⅰ, 재위 1553년 ~ 1558년)
후임자 : 제임스 1세(James VI of Scotland, 재위 1603년 ~ 1625년)
국적/왕조
잉글랜드
재위기간
1558년∼1603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잉글랜드 그리니치
1533년 9월 7일 잉글랜드 런던 근처 그리니치(Greenwich)에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어스컴에게 그리스·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음악·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에스파냐 왕 펠리프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정책에서 전 여왕 메리 1세의 가톨릭적 반동에 의해서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여왕은 수장령(首長令)과 통일령(1558)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국민에게 국교회(國敎會)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전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간의 치세 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 횟수는 불과 10회였다.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星室廳) 외에도 종교 범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W. 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베이컨, T. 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가계도
또한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폐의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다.
또 도제조례(徒弟條例, 1563)에 의하여 노동시간·임금 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1601)에 의하여 인클로저 운동과 수도원 해산으로 인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방지하였다.
유리·제당·제분·금속·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 이의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정책을 채용하였다. 특히 역점을 둔 공업, 이를테면 모직물 공업의 발전은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게 하였으며, ‘모험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한 회사 조직에 의한 많은 무역 단체에게 특허장을 교부하여 조직함으로써 무역의 확대와 해외 진출을 도모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과, 월터 러리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프 2세의 구혼을 거절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으며,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F.드레이크와 J. 호킨스에게 명령하여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 선박의 해상 지배를 위협하였다. 펠리프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가톨릭파의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당해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스파냐의 해상지배는 무적함대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 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명랑한 잉글랜드’가 이루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스펜서·베이컨 등의 학자·문인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여왕은 ‘선녀여왕’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90년 이후부터는 퇴색되어 ‘반독점 논쟁’에서는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처녀여왕으로서 노쇠하여 죽었고,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1558.1.15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대관식이 거행된 1월 15일은 매섭게 추웠다. 스물다섯의 엘리자베스는 웨스터 민스터 홀에서 걸어 나왔다. 흰 담비 털가죽으로 안을 댄 실크 망토, 에베네 치아산 황금과 진주가 달린 진홍색 벨벳 모자로 잔뜩 치장한 채였다. 교회들은 한꺼번에 종을 울렸고 오르간, 트럼펫 소리와 수 만개 촛불이 성스럽고 화려하게 넘쳐흘렀다.
헨리 8세와 '천일의 앤'사이에 태어난 명민한 공주
영국에서 16세기는 해외 원정에 돈을 쏟아 붓던 탐험과 모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잉글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던 월터 롤리 경과 세계를 항해했던 프렌시스 드레이크 경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원정에 나선 결과,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여왕을 기리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 북부를 '버지니아(처녀의 땅)'라 명명할 수도 있었다. 이 여왕이 바로 영국의 16세기를 빛낸 엘리자베스 1세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를 낳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날씬한 몸매이면서도 위엄에 가득 찬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했다. 간통을 스물두 차례나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헨리 8세가 참수를 지시했다. 이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까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 때부터 군주로서의 자질을 개발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 스스로도 ‘그리스, 로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를 자유롭게 쓰고 읽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세 시간씩 역사책을 읽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가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아이였다. 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가 열다섯 살에 죽어버리자 역시 배다른 언니 메리가 여왕이 된다. 메리는 헨리8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 태어났으며, 신앙심에 극도로 의존한 결과 신교도를 마구 탄압해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라 불렸다.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신교를 믿는 게 아닌가 의심해 석 달간 런던탑에 가둬버린다.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는데, 정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시골에 콕 박혀 지낸다.
"평생 처녀로 살다 간 왕이라는 비석만 세울 수 있다면 만족한다"
엘리자베스의 은둔 생활을 끝내게 한 것이 메리 여왕의 서거였다. 다음 왕위의 승계자로 지목된 그녀는 즉위식 날 두 가지 영국 왕의 징표를 얻게 된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꼈고, 무게가 3킬로그램에 이른다는 잉글랜드 왕실 왕관을 썼다. 그녀는 당면한 두 가지 안건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바로 결혼과 종교. 첫 번째 문제인 결혼에 관한 그녀의 결론은 이랬다.
“한 시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평생 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석을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처녀 여왕의 전설을 만들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그 이유 때문에라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대관 이후 25년 간 후계자와 관련해 여왕의 결혼 문제는 끝없는 추론과 억측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소문을 낳았다. 이미 사생아를 낳아서 기른다거나 혹은 난잡한 사생활을 즐긴다거나 청혼 받는 게 취미라거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거나 혹은 자궁이 기형적인 안드로겐 내성 증후군 환자라는 등의 소문이었다. 그녀는 당대의 ‘훈남’ 로버트 더들리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더들리의 아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는 특히 소문이 극성을 부렸다. 여왕이 추악한 살인을 못 본 척하고 더들리와 결혼해 왕국과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종교에 관한 한 그녀는 언니와 달리 광신도가 아니었고 신교 구교 가리지 않고 광신적 행위라면 혐오했다. 그녀는 평생 인간의 양심은 타인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과 비밀스런 생각을 억지로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개신교가 잉글랜드 국교가 되었고 그때부터 종교적인 탄압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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