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광해군과 인조반정이란 가계도 대나무 병자호란 삼배구고두

by 리베로수 2021. 6. 27.
반응형

광해군과 인조반정이란 가계도 대나무 병자호란 삼배구고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조선의 16대 왕 仁祖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 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동사 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파주 장릉


재위기간
1623년~1649년


출생-사망
1595 ~ 1649

 

가족관계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아버지 원종(元宗),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자 화백(和伯). 호 송창(松窓). 휘 종(倧).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 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 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綾陽君)으로 진봉 되었다.

 

인조 가계도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 정책을 지양하고 반금 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義)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功西)·청서(淸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李珥)·이원익(李元翼)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中江)·회령(會寧)·경흥(慶興) 등지에 개시(開市)하여 그들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였다.

1628년 벨테브레이(Weltevree:朴淵) 등의 표착(漂着)으로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또 정두원(鄭斗源)과 소현세자를 통하여 서양의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1634년 양전(量田:토지조사)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였으며, 연등 9분(年等九分)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稅制)를 합리화하였다. 1645년 볼모 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 씨(姜氏)를 사사(賜死)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난국 속에서도 군제(軍制)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변(北邊)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한편 《황극 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 보편(東史補編)》 《서연 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육(金堉)·김집(金集)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능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조선시대 이른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뒤에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 세 명이었다. 이 가운데 ‘반정(反正)’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이 교체된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이다. 그런데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을 보면 중종과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기간 1623~1649)는 아주 달랐다.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몸소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광해군에게 눌린 울분의 세월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뒤에 元宗으로 추존됨)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뒤에 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맏아들로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인조의 조부가 되는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다.

후궁 인빈 김 씨의 소생인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자식으로는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 군 명이 있었다. 아들 덕분에 죽어서 왕으로까지 추존된 정원군은 생전에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아들인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자, 그 뒤로 몸과 맘이 상하여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은 후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조에게 그에 걸맞은 일화가 없을 수 없다. 광해조에 변방에 귀양 가 있던 김시양이라는 사람이 하루는 정원군이 반정하는 꿈을 꾸었다. 심상찮음을 느낀 김시양은 자신의 일기에다가 이렇게 썼다.

“옥부(玉孚)가 불을 들었으니 범해(虎年)의 일이다 玉孚擧火虎年事”
[연려실기술] 권 23, ‘인조조 고사본말’ 계해 정사
정원군의 휘(諱)가 옥(玉)과 부(孚)를 합한 부(琈)이고 중종(中宗)이 병인년(호랑이 해이다)에 반정(反正)을 하였으므로 이런 은어를 쓴 것이다. 이로부터 2년 후 정원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계해년(1623년)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인조)이 그 꿈을 실현시켰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고조의 화신
장남이었던 능양군 대신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죽게 된 것에는 아마도 성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평소 무예에 능하고 인망도 높았던 능창군과 달리 능양군은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크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이런 능양군을 평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실록]의 ‘인조대왕 행장’에 따르면, 능양군의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는데 선조는 이것이 한나라 고조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표현이 적으니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추측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게다가 글을 아주 잘 지었으나,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아들과도 거리를 두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장성하여 출궁 한 뒤 입궐해 들어오면 시중들던 젊은 궁녀들을 피신시켜 자식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모자는 인조 자신과 신경진·구굉과 같은 인조의 외척세력, 이귀·이서·김류·장유·심기원·김자점 등 소외된 서인 문신 집단이 중심축이었다. 이들은 평소 광해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반정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인조반정에 대해 기술된 주요 사료는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이다. 

 

이들 사료들에는 정치적 문란과 폐모(廢母), 친후금의 중립외교 등 광해군의 실정을 동기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각자 자신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반정이라는 한 뜻을 모았을 뿐이다.

반정이 시작되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인조를 포함한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궁궐에 불길이 솟자 이를 본 광해군은 옆에 있던 내시에게 "타성(他姓)이 역모를 했으면 종묘에 불을 질렀을 것이니 올라가서 살펴보라"라고 했다. 내시는 함춘원(含春苑: 창경궁 홍화문 밖 동쪽에 있는 정원)에 불이 난 것을 종묘로 착각하고는 "종묘에 불이 붙었나이다"라고 보고했다.

“내 대에 와서 종묘사직이 끝나는구나.” 광해군은 긴 한탄과 함께 북문 담을 넘어 도망쳤다. 사실 궁궐에 불이 나기 전에 광해군은 반정의 고변을 보고 받았으나, 심각성을 몰랐고 위급함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반정을 정당화시키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인 인목대비의 윤허가 없다면 왕위에 오른 들 오래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조의 측근들은 대비가 있는 서궁으로 달려갔다. 처음에 인목대비는 반정을 믿지 않았다. 대비는 내가 “죄인(광해군)을 직접 봐야 너희들의 말을 믿겠다”라고 고집을 피웠다. 

 

수색 끝에 민가에 숨어있던 광해군이 잡히자 인조는 직접 광해군을 데리고 대비전으로 갔다. 대비는 옥새를 가져오라 명령한 후 왕으로 책립 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윤허만 내려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대비가 새삼스레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자, 인조를 포함한 주모자들은 속이 타 들어갔다. 대비가 인조가 아닌 선조의 다른 왕자나 손자에게 옥새를 내어준다면 정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손쉽게 정변에 성공했지만, 마지막 대비의 윤허를 받기까지의 시간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인목대비를 깍듯하게 모셨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수도 서울로 쳐들어 오자 몽진 길에 올랐던 인조는 궁궐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비 때문에 애를 태웠다. 인목대비가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마음을 바꾸게 되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패륜자로 몰아 반정의 명분을 삼았던 인조 정권의 기반은 이처럼 약했고 그 후유증은 모역 사건과 고변,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백성의 사랑을 얻지 못한 왕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실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조반정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진 것이고 그를 도운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을 믿어 줄 어리석은 백성은 없었다. 당시 여론은 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서울에 입성할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서울을 떠나던 날, 그를 따르던 백성은 하나도 없었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

파죽지세였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인조는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그의 처지는 늘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인조와 그를 추대한 공신들은 사림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했다. 겉으로는 효심에 찬 행동이었지만, 실제는 종법(宗法)적 정통성이 만들어 약했던 권력 기반을 다져볼 목적이 더 컸다.

국제정세의 오판과 병자호란의 발발
16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라는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었다. 명은 신종의 학정과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이 틈을 타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 휘말리지 않고자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후금 외교정책은 강경노선으로 바뀌었다. 외교뿐만 아니라 인조와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이 벌인 일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조건 반대했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 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 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 후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반응형

댓글